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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 가게 1 (소설)

담뱃가게의 주인은 가게를 넘긴다고 말하면서도 가게를 넘기지 않았다. 늦게까지도 불을 켜놓는 원룸들의 불빛이 다 꺼질 무렵, 내 담뱃갑에 담배는 동났고 나는 그 담뱃가게에 담배를 사려고 밖으로 나왔다. 낡은 가게들과 기껏해야 3층 남짓인 원룸 오피스텔만 있는 이 동네의 불들이 모두 꺼져 있었다. 마침 소나기가 거세게 떨어진터라 건물 사이의 골목들에는 물자국과 안개가 가득했고 단지 드문드문 나있는 가로등과 담뱃가게만 불이 켜져 있었다. 옆으로 미는 오래된 문 앞에 ‘담배’라고 적혀있는 그 담뱃가게는 안으로 들어가면 꽤 잘 정돈되어 있었다. 다만 그 구석으로 들어갈수록 어두컴컴했다. 와인바처럼 오른쪽으로 길게 늘어선 테이블의 끝자락으로 들어가면 주인이 불을 끄고 테블릿으로 영화를 보고 있었다. 그 구석, 그러..

글/문학 2023.11.15

#(소설)

벽지의 #모양의 각질들이 떨어지고 있었다. 분명했다. 그것들을 지켜보면 그 문양이 먼지처럼 떨어져 내렸다. 가끔씩, 눈이 눈알 속으로 떨어지듯이, 그 모양이 내 앞으로 다가와서 나를 놀라게 했기에 벽지에서 그 모양이 떨어진다는 것은 더욱더 확실했다. 나는 그것을 꿈에서도 보았다. 그 문양이 검은 허공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그리고 내 초점은 당연히 그 하얀 문양 속으로 빠져들어가고 그때 그것은 자신의 형체를 뒤틀어가며 갑자기 내 눈앞에 다가왔다. 그럴때면 나는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꿈에서만이 아니었다. 나는 당연히 그런 악몽을 꾸면 울어버리곤 했고, ##### ##### ##### 들이 우는 나를 보고 놀라서 불을 킨 어머니에 의해 비춰지곤 했고, 그것이 다시 떨어지곤 했으며, 그것이 ..

글/문학 2023.11.15

영상조립시점

아이는 지독한 나르시시즘에 빠져 자신의 살을 물어뜯다가 고통을 느끼고는 살이 반 정도만 붙어있는 손목을 늘어뜨린다. 이제 너의 그림을 그려보렴. 아이는 떨어질 듯한 팔을 아가리로 지탱하고 본 적 없는 천국의 그림을 그린다. 전할 수 없는 그림, 언어로는 전할 수 없는 그림이다. 이것을 불태워야 하겠노라고 아이는 말하고, 어제까지 안고 자던 곰 인형을 태운 그 자리에 A4용지를 떨어뜨리곤 라이터로 불을 붙인다. 아이의 동공이 활발하게 움직이고 아이를 찍던 카메라들은 고개를 숙인다. 어젯밤에 추락하는 꿈을 꾸었어요, 키가 자랄 거야, 여기서 더 커지면 거인이 될 거에요, 원래 다 거인이 되어 간단다. 울지마렴. 아, 아이야 제발 울지마렴. 앞이 단단한 트럭이 치고 간 자국이 아이의 이마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

글/문학 2023.11.10

할리온

내 천박함이 어떻게 당신에게 사랑으로 닿을 수 있었을까 사랑한다는 말이 모래사장에 써진 글귀처럼 부서지는데 내 천박함은 사랑이라는 가면을 쓰고 당신에게 닿는다. 이건 치기의 사랑이 아니다 내 목숨이 폐수처럼 자기 길을 잃고 고여있는 동안 어디로 가야 할지를 알려준 사랑이다 언제쯤 갚을 수 있을까. 집으로 가면 따뜻한 밥이 차려지고 사랑을 나눌 연인이 생겨나고 내 불안을 잠재울 포옹이 마법처럼 일어나고 부드러운 키스와 그 사랑이 단지 대학생의 연애가 아닌 그 이상인 것임을 알고 있다. 시대착오적이다 먼지 한 톨 없는 책상을 손으로 스윽 문지르며 강물이 아니라 바다에 왔다고 생각한다 난 이미 바다에 와있다고 믿는다 그 한 사람 만으로 나는 바다에 와있다. 그러니, 수평선이 눈부시고 보드랍다.

글/문학 2023.11.10

2020 소설 '고문'

아주 늦은 밤이었을 때 일을 다 끝내고 나는 내 방으로 돌아왔다. 문을 열자 인간의 형체 하나가 보일 듯 말 듯 꿈틀거렸다. 방은 너무 어두웠고, 앞에 나 있는 창 두 개가 달빛을 비추어 주고 있을 뿐이었다. 인간의 형체는 왼쪽 구석 서랍장 옆에 쭈그리고 앉아 꿈틀거렸다. 나는 불을 키려고 스위치를 찾아 손을 더듬거렸다. 그러자 인간의 형체가 소리쳤다. “키지마!” “왜 온거야?” “얘기할 게 있어서 왔어.” “무슨 얘긴데?” “나 오늘 해고됐어.” ‘아아’하는 소리로 안타까움을 표하며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곤 그의 옆에 그와 똑같은 자세로 쭈그리고 앉았다. “저 시위 때문에 그래?” 나는 창밖을 가리키며 말했다. 창밖 맞은편 건물에 달린 플랜카드에는 ‘미개의 산물인 고문 취조, 이제는 끝내야 한다.’라..

글/문학 2023.11.05

한탄

가만히 앉아있는 나, 뭘 쓸지 고민하다가 섹스에 관해 쓸지, 철학에 관해 쓸지, 아니면 책에 관하여 쓸지-특히 다자이 오사무-, 그냥 가만히 앉아있다. 1리터가 넘는 커피를 빨았다가 잠시 놓는다. 빨대에 올라온 까만 아메리카노가 위로 올라왔다 내려가기를 반복한다. 뭐, 어느정도는 내가 내 침을 먹고있는 것이다. 섹스에 관해 쓸지를 고민할 때, 가장 먼저 떠올랐던 것은 섹스의 호의적인 관계성과 사회에서 나의 위치다. 정말로 섹스는 사회에서 나의 가치를 바꿀 수 있다. 그러나 점점 멀어져만 가는 것들을 붙잡을 순 없다. 섹스로 성장한다-이것은 정말 맞는 말이다. 동거로 하루 한 번 이상 반복되는 섹스는 정말로 나를 성장시킨다. 어떤 호르몬인지 모르겠지만 이 여자를 지켜야 한다는 것 말이다. 그러나 예전에 만..

글/사색 2023.10.30

아버지

나에겐 아버지가 두 명 있다. 두 명은 모두 나의 친아버지다. 아버지가 두 명 있다는 것은 어릴 적 나에게 콤플렉스였다. 선생님이 주는 프린트에서 가족관계를 묻는 문항이 나오면, 아버지 두 명을 모두 적어야 했고, 친구들은 내 프린트를 걷으면서 아버지가 두 명인 것을 보곤 그것을 주제로 수군대고는 했다. 참관 수업 날이면 두 분이 항상 같이 오셨고, 두 분 모두 한 아이의 아버지로 선생님과 학업, 학교생활에 관한 상담을 했다. 그러므로 친구들은 눈에 띌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들을 가지고 나를 놀려댔다. 나는 그런 짓궂은 놀림을 혼자서 이겨낼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이겨내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지금도 나는 아버지가 두 명이라는 것에 대해서 약간의 부끄러움과 불쾌감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날..

글/문학 2023.02.07

극단적인 언어유희

극단적인 언어유희는 적어도 치과에서 발생된 것은 아닌 것으로 알려진다. 치과는 이를 치료해주는 곳인데 언어유희는 프로이트적 정신분석학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융은 절대 아니고 라깡이 코기토를 재전유했고 프로이트는 거기서 호통을 친 적이 있었다. 라깡은 눈을 부라렸다. 저기 저 외국인 노동자 샤르트가 에꾸눈으로 우릴 지켜보고 있다고, 데카르트는 그냥 누워있어서 나의 빈축을 샀다. 그래서 데카르트는 무덤에서 일어나려고했지만 그 깊은 공간의 흙을 이겨내고 올라오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라서 그냥 누워버렸다. 프로이트는 자신이 철학자가 아니라고 말했지만 자아를 설명했으며 그러므로 그 시대를 대변하는 가장 파급적인 철학자였다. 그때 의식은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한 내가 프로이트와 라깡의 강연장으로 가서 코기토부터 ..

글/사색 2022.11.17

11/17

강의 시간에 글을 쓴다. 말이 안 되는 글이다. 숙취 때문에 머리가 조금 아프다. 듣지 않아도 되는 강의다. 머리가 아픈 것이 맞을까. 아니 좀 답답하다. 냄새 때문에. 알바비를 전부 술에 들이 붇는다. 나와 소원해진 형은 아예 나와의 관계를 끊어버리려고 하는 가 보다. 버려지는 건 익숙하지만 익숙하다고 해서 아프지 않은 적은 없었다. 나와 할 말이 없어서 끊어져 버린다는 것. 나와 같이 얘기하면서 웃었던 적이 몇 번이나 있을까. 내 진정한 친구들도 내 자존감을 깎아 먹을 때 말고는 웃었던 적이 몇 번이나 있었을까. 필력이 쓰레기 같다고 말하는 것도 이젠 자기 반복이다. 억지로 쓴다. 향수의 잔향과 옷의 눅눅한 냄새. 어젯밤 늦은 수음의 냄새와 맥주의 알딸딸한 냄새가 난다. 배려하면서 쓴다는 것은 무엇일..

글/일상 2022.1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