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사색

극단적인 언어유희

애매모호 2022. 11. 17. 00:42

극단적인 언어유희는 적어도 치과에서 발생된 것은 아닌 것으로 알려진다. 치과는 이를 치료해주는 곳인데 언어유희는 프로이트적 정신분석학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융은 절대 아니고 라깡이 코기토를 재전유했고 프로이트는 거기서 호통을 친 적이 있었다. 라깡은 눈을 부라렸다. 저기 저 외국인 노동자 샤르트가 에꾸눈으로 우릴 지켜보고 있다고, 데카르트는 그냥 누워있어서 나의 빈축을 샀다. 그래서 데카르트는 무덤에서 일어나려고했지만 그 깊은 공간의 흙을 이겨내고 올라오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라서 그냥 누워버렸다. 프로이트는 자신이 철학자가 아니라고 말했지만 자아를 설명했으며 그러므로 그 시대를 대변하는 가장 파급적인 철학자였다. 그때 의식은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한 내가 프로이트와 라깡의 강연장으로 가서 코기토부터 잘못된 거라고, 그 비약을 느끼는 것만으로는 의식을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하자 그들은 알았다고 말하며 왼손을 들자 옆에 있던 보안관들이 나의 두 팔을 잡고 끌어내렸다.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울고있는데 눈을 떠보니까 라깡의 얼굴이 바로 눈앞에 있었고 그의 징그러운 주름이며 눈의 혈관까지 나에게 다가왔다. 왜 의식이 없다고말하지라고 말했고 나는 의식은 그 의식을 의식하려고 할 때 그 시간만큼 달아나버리는 것이며 의식을 반성하는 의식은 의식이 최소한 두 개가 존재해야 하는데 의식을 비판하는 의식이란 것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당신이 뛰는 도중에 뛰는 것을 의식하면서 그것을 비판하는 의식을 가질 수 있냐고 물었고 당연히 그렇다는 대답을 듣고는 내가 진짜 병신인가? 내가 아류작인거 아닐까? 카뮈가 말한 인간의 한계가 나보다 더 아득하게 높이 떠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했고 그럴바에 그냥 자살하기로 마음먹고 졸피뎀 3개를 먹었더니 난 정말로 죽었다. 그들이 말한데로 의식은 두 개니까 죽을 때 나는 죽는 나를 반성하고 있었다. 이 글이 그 증명이다. 어떤가? 제대로 증명이 되었는가? 당신들 마음대로 증명이 되었는가? 무의식 층위를 다시 은폐하려는 수작에 도움이 되었는가? 그래서 나는 지금 죽은 상태로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내가 누워있는 여기 이 관은 답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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