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10/4

진도를 놓친 교양수업과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는 중간고사 기간. 매일 떨어지는 것 같은 숨을 간신히 붙잡는다. 그러면 그 숨은 내 머릿속으로 고요하게 맺힌다. 다른 표현을 쓰긴 쓰는건지 모르겠다. 원래 실낱같던 창의력마저도 전두엽이 썩으면서 이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고요하게 산책하던 본가에 다시 가고 싶다. 외로울 때 들리던 아버지의 코골이 소리가 그립다. 낮에 같은 방에, 맨바닥 위에 누워 보던 홍상수의 영화들도 그립다. 당신과 내 호흡이 일치하는 순간이 그립다. 내가 그 호흡을 따라가려고 숨을 참던 시간도 그립다. 그런데 이 그리움은 그저 외로움 때문에 태어났다. 당신을 그만큼 사랑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죄책감이 글에 살짝 묻는다. 번진다. 차라리 환각제가 필요하다. LSD가 필요하다. 졸피뎀..

글/일상 2022.10.04

플리츠 스커트

늦은 저녁 택시 운전을 하고 있을 때였다. 청색의 빛깔이 만연한, 아무도 없는 거리 가로등 한자리에 여자가 서서 차를 향해 오른쪽으로 팔을 뻗었다. 깨끗한 피부와 은은한 화장을 했고, 까만 머리칼을 가지고 있는 여인이었다. 위에는 품이 크고 소매가 길어 손가락 정도만 간신히 보일 정도의 선명한 회색 맨투맨을 입었고, 아래에는 검고 길면서 보통보다 폭이 큰 플리츠 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발은 가죽끈이 여러 개가 이어진 굽이 약간 있는 검은 샌들이었다. 발목 바로 위까지 올 정도로 굉장히 긴 플리츠 스커트였다. 플리츠 스커트, 아름다운, 그 아래―― 내가 속도를 올린 탓에 방지턱에서 심한 덜컹거림이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가도 된다고 말했다(목적지에 늦게 도착하는 것을 원하는 것 같기도 했다). 푸른빛들이 ..

글/문학 2022.10.01

오이디푸스 합리화

페터 한트케의 ‘패널트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을 왼쪽에 내려놓는다. 그저 책 한 권일 뿐인데, 떨어질 때 꽤 요란한 소리를 냈다. 갑자기 바람이 불고, 왼쪽에 떨어진 책 페이지가 스르르 넘어간다. 마지막 페이지까지 다 넘기고 나서야 바람이 멈춘다. 뒷표지는 넘어가지 않았다. 그래서 내 손으로 뒷표지를 넘겼다. 도대체 앞이 어딘지 구분을 할 수가 없다. 그러니까 내 말은, 앞에서 보는 앞이다. 책을 내려놓은 그곳에는 전구가 밝혀져 있고 뒤편까지 그 전구들이 다달이 붙어 있다. 떨어뜨린 책 옆에서 보는 뒤편은 끝이 보이지 않게 전구가 늘어져 있다. 그런데 옆(옆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은 전혀 보이지 않고 앞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 잠깐 앞으로 내달으면 그 뒤편의 전구까지도 갑자기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다..

글/문학 2022.09.30

가속도

저는 마찰이 없이 달려요. 매달리고 회전하는 서커스 단원 같죠. 저의 모든 동작 하나하나는 자유를 뜻해요. 반대편에 있는 것과는 다르죠. 저는 우리들 중 유일한 자유에요. 저는 투신과 다르고 교수와 비슷해요. 저는 절대 추락하는 법이 없죠. 날고 있다는 뜻으로 비행기와 같다고 말해도 될까요. 그렇다면 맑은 날도 아니지만 우중충한 날도 아닐 거에요. 밖에서도, 안에서도 엔진의 소음과 위치를 알리는 승무원은 존재하지 않아요. 목적지는 제주도를 향해 날아가고 있어요. 투신이 아니니까 절대 추락하는 법이 없어요. 여행을 돌아오는 길에 택시를 타게 된다면, 비와 라이트의 착시현상일 수도 있겠네요. 종말의 싱크홀과 기괴한 집이에요. 저는 결국 제가 리듬이 아님을 알게 되었죠.

글/문학 2022.09.29

제주도에서

아픈 곳이 어딘지 모르겠다. 계속 아픈데 어딘지를 모르겠어. 몇 군데가 아프지? 몇 군데가 아픈가? 아니면 한 부분이 아픈가? 모르겠어. 어느 정도로 아프죠? 1부터 10까지 있다면 어느 정도로 아프죠? 모르겠습니다, 선생님. 그것도 모르면 치료를 할 수가 없어요. 그런가요? 그렇다면 그냥 진료실을 나갈게요. 나는 진료실을 나섰다. 밝은 날이다. 구름이 없고 햇빛이 따듯하다. 그런데 왜 날씨가 우중충할까? 날씨로 치면 구름이 끼고 우중충한 날들이 계속되는 것이다 ̄심리검사에서. 나는 날씨가 우중충하지 않은 날을 알지 못해요, 분석가님. 조금 과장되게 진술한 부분이 없지 않으나 진료 결과를 의심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내가 뭘 과장했다는 거죠 “Xxx”에서 충격을 먹었어 ̄아니, 씨발 제가 얼마 전에 준 소..

2022.09.25

공원 가운데(2021)

그녀는 결국 아무런 저항 없이 나를 따라왔다. 나는 뒤를 돌아서 그녀를 쳐다보았다. “웃어봐”, 내가 하고 싶은 말을 그녀가 먼저 했고 나는 입꼬리를 어색하게 올렸다. 그러자 그녀도 눈을 가늘게 뜨고 웃는 체를 하였다. 옆에 모텔이 보였지만 모텔로 들어가진 않았다. 우리들만의 방이 필요했다. “숲으로 들어갈까? 거기에 노숙자들이 지어놓은 컨테이너 집이 있지 않을까?” 산 앞에 있는 가까운 공원으로 들어가서 그 가운데를 지나갔다. 운동하고 있는 사람들, 산책하고 있는 사람들이 큰 원을 따라서 걷고 있었다. 우리가 걷고 있는 가운데로는 절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들어오세요!” 내가 크게 말하자 그들은 우리를 순간적으로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눈을 돌리고 하던 일을 했다. “우리도 곧 나갈 텐데” 그녀가 소곤거..

글/문학 2022.09.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