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사색

프랑스적 사유의 기반에 관해

애매모호 2022. 8. 15. 00:28

나는 사유한다―이것은 당연히 잘못된 말이다. 사유는 활동이고 활동은 하나의 주체가 필요하므로―이러한 주장은 당연히 문법적 속박 아래에 있다. 사유가 활동이라고 일컬어 진다면 사유는 시간과 관계한다. 사유라는 기표가 말하고자 하는, ‘순수한 사유’라고 말하고자하는 니체의 사유는 시간과 관계성이 없진 않으나, 시간이 요소이긴 하나, 시간과 결합되어 있지는 않다. 사유에 대한 발전은 현상학과 같은 자리를 차지한다. 그들은 사유 외에 것들을 현상학으로 보았음이 틀림없지만, 사유 자체에 대한 고뇌는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사유한다―라는 가장 활동과 주체의 확실성과 연관되어 있는 추론이며, 시간을 포함해야만 하는 관계를 그들은 현상의 기본 토대로 세우려고 했다.
사유는 하나의 작업이다. 내가 적고자 하는 작업이라는 기표는 시간이라는 또 다른 기표를 상실해버린 기표이다. 그리고 주동적인 성분이 없어져 버린 기표다. 작업과 현상―이것은 가장 모순되어 보이면서도 가장 적합한 말이다. 사유가 기표로서 조금 확실해보일 수 있게 표현하는 기표는 ‘피지배’ 이것 하나이다.
사상은 내가 원할 때 오는 것이 아니라, 사상이 원할 때 오게 된다. 사상이 ‘어떠한 생각’의 보조관념이라고 생각하고, 사상이 ‘오는 것’이라는 말을 시적 은유로 생각한다면 사상은 나의 ‘원함’과 연관되지 않고 어떤 것에 제약받는 것이 아니며, 사상이 사유와 그것들(혹은 그것)이 있는 ‘순간’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사상은 사유와 합치되어 있고, 사상은 더는 ‘사유’의 대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화젯거리는―화젯거리로 기표들을 해체하고 연관시키는 사유―사상이다. 죽음에 대해서 생각할 때는 죽음과 합치되지 않고 죽음에 대한 생각이 사유와 합치된다. 자살이 옳은가 그른가에 대해서 사유할 때는 자살이 옳은가 그른가가 사유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살이 옳은가 그른가가 사유와 합치한다. 나는 생각한다고 생각한다―그것은 사유와 합치한다. 나는 생각한다고 생각한다고 생각한다―이것은 불가능한 사유다. 그것을 사유하고자 할 때 사유는 문법적인 것에 의존한다. (생각의 사유의 한계가 두 개가 아니다. 나는 생각한다고 생각한다―라고 할 때 생각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이미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 개의 층위가 존재하게 된다. 나는 생각한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을 때 첫 번째는 문법에 의해 거의 사라질 것같이 보이며, 두 번째는 기표로서의 사유이고, 그 마지막에는 사유 그 자체가 있다.)―이것을 부정해야 한다. 생각한다고 생각한다. 라는 것을 사유했을 때는 생각한다고 생각한다라는 것 자체가 사유와 합치한다. 생각한다고 생각한 것은 사유라는 밑바탕 위에 존재하지 않으며 사유와 결합해 존재한다.
사상은 당연히 ‘오지’ 않는다. 그것은 필요불가결한 단어다. 사상과 사유는 같이 존재한다, 같은 관계에 있다. 사유는 어딘가에서 존재하다가, ‘어느 순간’ 혹은 ‘짧은 시간’이라고도 말할 수 없는 현상으로서 우리의 사유에 존재한다.
우리는 ‘구토’를 잊지 말아야 한다. 구역질도 하나의 사유로서 인정해야 한다. 구역질은 하나의 기표가 아님에도 사유로서 존재한다. 모든 사유가 기표로서 존재하지는 않는다. 하나의 기표로서 추론되는 사상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 그것들도 사유로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사유의 일정 단계로 올라가려면, 기분에서 우리가 ‘생각’이라고 부르는 그 층위로 올라가고자 한다면―그것은 그 순간―현상, 기표들로 무장한 채 사유로 존재한다. ‘기본적인 거부감’ ‘기본적인 호의’ 모든 것들은 사유다.
그러므로 사유는 하나의 활동이 아님이 증명되었다. 사유는 언뜻 사물이 눈앞에 존재하듯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주체라는 것, 주체라는 환상, 혹은 하나의 사상을 가지고 움직인다고 착각하는 우리들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한 사람의 존재에는 하나의 기투가 존재한다. 그 기투들의 종합은 일체의 종합을 가진 것처럼 해석되지만 우리는 이제 그 해석을 내려 놓아야 한다. 기투들의 조합은 일체성을 가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아직 남겨진 것들이 있지 않은가? 아직 남겨진 문제들이 존재하지 않는가? 사유와 사유의 연쇄적인 발생, 하나의 사상에 의한 종합적으로 보여지는 혹은 하나의 성격을 띠는 행동들의 종합―이것들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주체는 존재하지 않고, 사유가 타성으로서 존재한다면(나는 이 모든 것들의 기표에 취소선을 그어버리고 싶다.) 어떻게 사유의 연쇄와 행동 간의 성격의 종합이 가능하게 되는가?
나는 이것에 대한 해결 모델로서 정류장을 제시하고 싶다. 그러나 무한한 힘을 가진 정류장이 하나의 주체라는 허상을 만들게 된다. 이 정류장은 어떤 ‘사람’이 운영하고 있지 않다. 정류장은 그대로 존재하는 어떤 버스(사유)들이 거쳐감에 따라 자연스럽게 그것이 정류장인 것처럼 인식된다. 정류장은 하나의 건물이 아니며, 하나의 허상일 뿐이다. 사유들이 자의적으로(나는 이 부분을 아예 지워버리고 싶다.) 그곳으로 자꾸만 현상적으로 존재하고자 한다. 그러면 비어있는 곳에는 정거장이라는 하나의 허상, 사유가 존재하고자하지 않는다면 전부 무너져내릴 뿐인 하나의 개념만이 남는다―이것이 ‘주체’다. 주체는 아무런 건물도 없는 길가에 존재하는 하나의 공간이다. 그러나 사유들이 머무름으로서 그 공간은 어떠한 가치를 가지게 된다. 사유가 다른 길가에 존재하지 않고 계속해서 그곳에서만 존재한다면, 우리는 주체라는 환상을 사유의 성격과 아예 분리하지는 못할 것이다. 버스가 계속해서, 어떤 목적도 없이 계속해서 머무르게 되는 곳―버스가 어떤 목적이 없이 머무르지 않는다면 개념을 만들어낼 수 없는 곳―우리는 주체를 사용해야 한다. 이 허상뿐인 개념이 어떠한 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사유는 버스와 같이 ‘오지’ 않는다. 활동이 아니다. 버스는 거기에 갑자기 존재한다. 그러나 정류장은 버스가 그곳에 있다는 것을 ‘인식’ 하려고 한다. 그러나 정류장에 버스가 들어오고 나오는 활동이 인지되는 것은 아니다. 버스는 거기에 ‘존재한다.’ 그러나 수많은 버스, 셀 수 없는 버스들 가운데서 ‘있는 것’을 ‘인식’하려면 하나의 버스에 ‘초점’을 맞추지 않으면 안 된다. 수 많은 버스들은 거의 무한대로 존재했다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버스에 초점을 둔다’라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버스가 입자라면, 우주와 같이 팽창하고 줄어든다. 그러나 팽창함―줄어듬에서 우리는 ‘시간’이라는 개념을 지워버리도록 ‘노력해야만’ 한다. 하여튼 버스들 가운데서 하나의 버스, 혹은 몇몇 버스들에 초점을 두게 된다면 버스는 저 앞 마당으로, 버스가 움직일 수 있는 마당으로 나가게 된다. (이것들에서도 시간의 개념을 지워버리도록 간청한다) 버스가 어느새 나와서, 엔진이 걸려있는 상태가 사유가 존재하는 상태다. 그 버스와 관련된 기표의 버스들에게 정류장은 초점을 보내고, 초점을 받은 버스는 다시 등장하게 되고, 초점을 받지 않는 상태였던 버스는 다시 존재하지 않거나, 정류장에 보이지 않는 곳에 존재하거나 초점이 두 개의 버스를 본다면 함께 존재한다.
버스는 자신이 익숙한 정류장에 ‘존재’하고 싶어 한다. 자신들이 간택 받았던 정류장에 있기를 원한다. 그러므로 익숙한 버스들이 그곳에 존재하며, 그것이 초점을 받으면 사유로 나타난다. 사유로 간택되지 않았던 버스들은 존재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나는 버스들이 기표로서 존재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정해야한다. 사유의 연쇄는 기표의 영향을 심하게 받는다는 사실이 명확해졌다. 그러나 연쇄되지 않은 최초의 사유는 기표로서 존재하는가? 기표로서 존재하지 않는다면 나는 정류장에서 나오는 버스를 기표로 장식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 그러면 ‘초점과 기표로서의 장식’이라는 하나의 존재가 너무 강해지지 않는가? 애초에 그것이 강한 존재는 아닐까? 선택되어지는 버스가 마당으로 나오면, 그것들을 장식한다고 말하려고 했지만, 그것 또한 같은 말이다. 하지만, 굳이 절차로서 그것들을 정의하고자 한다면 버스는 선택된 다음에 기표로 존재한다. 그렇다면 그 힘을 주체의 ‘무의식’으로 돌려버리는 간단한 작업으로 끝마쳐야 할 것인가? 잠깐, ‘무의식’이 주체를 담당하는 기관이 될 수 있지 않은가? 사유는 버스가 수없이 존재하는 정류장에서 ‘초점’이 버스를 선택한 뒤에, 버스를 다시 기표로 장식하는 활동이 ‘사유’라는 존재가 아닌가. 사유에서 타성적이지 않은 부분과 확실히 타성적인 부분을 나눌 수 있지 않을까? 이태까지 나는 왜 사유의 존재는 ‘하나의 활동 비슷한 성격’을 가진 하나의 존재라고 생각했을까. 나는 앞서 계속해서 사유가 ‘시간을 가지지 않은 작업’이라고 말하고 싶어하지 않았는가? 다시 앞서말한대로 사유는 ‘시간을 가지지 않은 작업’이 된다. 다시 간단하게, 사유는 수많은 버스가 존재하는 정류장에서 버스를 선택하고 기표로 장식하는 하나의 작업을 말한다. 그렇다면 무의식을 통해 버스는 선택 되어지고 기표로 장식 되어지고 사유라는 하나의 확실한 ‘환상’에 존재하게 된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무의식’이 존재하고 그것이 ‘나’는 아니다. 무의식이 버스를 선택하고 장식하는 것을 끝나치면 그것을 ‘나’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무의식’이 ‘그 무엇’이다. ‘그 무엇’, ‘무의식’이 사유할 것을 고른다. 버스는 기표로 장식되고, 기표가 분해되어 연쇄작용을 일으킨다. 이것이 ‘나는 사유한다’라는 환상이다. 하지만 ‘무의식’은 하나의 주체의 성분이라는 성분이 너무 섞여버린 말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앞서 말한 듯이, ‘무의식’이 아니라 그것은 하나의 ‘정류장’이다. ‘정류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정류장은 우리가 지금까지 ‘주체’라고 말해왔던 그 배후에 있다. 정류장은 무의식이 아니다. 정류장은 버스와 같은 방식으로 존재한다. 끝없이 우리에게 ‘사유’라는 착각을 보내기 위해서.
오히려 버스와 정류장의 은유가 정류장의 힘을 너무 강하게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이것은 필요불가결한 은유다. 버스는 선택되어지고 장식되어진다. 정류장이라고 불리는 비워져 있는, 끝없는 땅들 중에 하나의 것이 나이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정류장이라는 힘’이 그 자리에 존재한다. (그러나 그 힘이 존재한다고 그 땅이 특별한 의미를 지니지는 않는다―어떤 힘이 있는 땅은 그 자체로서 의미를 가진다―이것을 나는 문법적 습관이라고 말하고 싶다.) 나는 그 힘을 만들고자 원하지도 않았고, 원한다고 해도 만들 수 없다. 더 깊이 들어가면 원한다는 것 자체가 그것이 존재함이다. ‘정류장이라는 힘’이 나의 의도와는 다르게 존재한다. 너무나 간단하다.

2
그렇다면 타성의 힘은 너무나 불가피하고 의미있는 것이 된다. 타성들 또한 내가 원한다고 해서 오지 않고 그들이 원할 때, 혹은 정류장과 버스가 원할 때 행동으로 타성을 만들어가기도 한다. 모든 감각기관들을 포함해 그것이 그 무엇을 인식할 때는 항상 불가피한 상황들을 만들어주며, 그 부조리는 나의 정류장과 버스들의 가능한 관계 속에 존재할 때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상상하지 못한 현상과 반응에는
― 당연히 인간의 놀라움이 있다. 이것으로 그 현상 자체는 사유에 놓이게 되며, 나중에 선택 가능할 수도 있는 버스로서 존재하게 된다.
놀라움에 있어서 가장 엄청난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은 텍스트, 또는 말이다. (그것들을 일단 같은 선상에 두고 말하고 있음을 이해해주기 바란다.) 텍스트를 읽고, 말을 듣는다고 함의 의미는 내 정류장과 버스들이 그것들을 원했다는 것이되며, 그것은 여전히 그것들의 속박을 받는다. 그러나 그 속에 있는 내용과 텍스트들은 내 내부에 존재하지 않았던 버스들을 가장 직접적으로 내 의식적인 사유의 한복판에 가져다 놓는다. 우리가 텍스트를 읽거나 텍스트에 관련된 텍스트나 말을 듣지 않으면 우리는 그것을 전혀 예상할 수 없다. 텍스트와 말은 폐쇄적 관계에 있고 서로 같은 궤도를 도는 정류장과 버스에게 갑자기 중요한 사유의 대상으로서 자신을 위치시킬 것을 요구한다. 생각에 쫓아다니는 ‘나’는 그 순간 직접적인 타성을 간접적인 타성으로 바꾸고, 그 피로에서 벗어난다는 환상을 가진다.
어디까지나 감각으로 느낄 수 있는 거의 모든 세계의, 활동적인 타성들은 그것이 충분한 예상 범위 내에 존재한다. 이것에 대한 해석이 두 개 이상의 그것들(정류장과 버스)끼리 다를 순 있어도, 하나의 그것에는 충분히 인정 가능한 선에서 받아들이게 되고, 그것이 바로 우리가 자연스럽게 세계를 받는 방식이다. 그러나 어떤 텍스트는,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범위 내에 있지 않다. 미술의 범위, 영화의 범위, 음악의 범위는 아주 전위적인 것들에 있어서만 제외하고 우리의 해석 아래에 놓이게 된다. 그러나 텍스트는(특히나 비문학적인) 텍스트는, 새롭다고 나오는 것들은 거의 항상 사유적인 놀라움을 만들고, 존재하지 않았던 것들을 우리 내부에 만들어 준다. 기표가 우리 내부에 존재하고, 새로운 기표는 사전에 의해 또 다른(그러나 예상가능한, 합리적인) 기표로 정립되어 지는데 왜 우리는 그것을 새롭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여기에서는 기표들 사이의 문법적인 구성이 역할을 한다.
어떠한(많은) 기표가 다른(많은) 기표들과 관계해서 하나의 의미를 만들 때, 그것이 정류장에 존재하지 않거나 정류장에서 나온 버스들이 이상한 통합을 시도하려고 할 때 새로움은 생겨난다. 문장―그 자체도 그러하며 문단이나 한 장 같은 커다란 부분에 있어서도 그렇다. 기표들이 하나의, 저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의 하나의 문단에 존재하게 되는데 그것이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라면(생각하지 않았던 사유라면), 기표들은 정류장과 사유에서 서로 충돌하게 되고 깨지고, 결합하고, 다시 존재들의 위계와 관계를 정립하게 된다. 이것이 내가 텍스트를 감각적인 부분들 우위에 두는 이유다. 감각적인 사유들은 원래 가지고 있는 버스들의 체계에서 변하지 않거나 늘어날 뿐이다. 그러나 텍스트의 사유는 기존의 버스들을 깨버리고 재배열하고 다른 의미로 생성하거나 더 이상 의미를 가지지 않은 것으로 격하시킬 수도 있다. 물론 텍스트가 지닌 버스들이 ‘늘어나는’ 성질에 관해선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텍스트에 의한 버스들의 변형은 합리성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의아하게 보인다. 합리성이라면 버스들이 존재하는 방식과 글이 말하는 방식이 같아야 작용할 수 있지 않은가― 이 사유조차도 합리성이라는 기표에 갇혀 버린 일이라고 말하고 싶다. 어떤 ‘새로운 것’, ‘생각되지 않은 것’ 또한 합리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애초에 합리성이라는 가치판단하에 있고자 하는 글들은 새로운 것과 생각되지 않은 것에 존재한다. 새로운 것이 기존의 것들을 깨부수는 것이다.
심지어 시의 은유들은 감정의 사유들까지 재배치하고 변형할 것을 제안한다. 그러나 이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감정에 대한 사유를 넓히는 것과 감정 자체를 변형시키는 것은 다른 것으로 인지된다. 슬픔의 감정이 사유에 있는 상태가 변하는 것과, 슬픔이라는 감정의 사유를 사유하려는 것에 대한 지식적인 측면이 변하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 시는 후자에 것에만 도움을 준다. 물론 현대 서정시의 목표가 여기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불가능한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으면서도 계속해서 시도할 뿐이다. 그들이 시와 언어학에 가까이 갈수록 감정의 상태를 바꾸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더욱 깨닫게 된다. 이런 제안에 완전히 몰두해 있는 시인들이 정신병적인 증상을 가지고 있는 이유가 이것이다. 반대로 자신의 목표를 잊어버리거나 포기한, 거짓을 적는 서정 시인들은 대부분 미치지 않는다.

3
현상이라는 것이 개인의 상상계를 통하여 만들어지고 어떠한 반응(허기)들이 도출되며, 그것들은 하나의 상상계로서 타인과의 관계를 통하여 더욱 확실하게 만들어진다면 나는 그것을 부술 수밖에 없다. 타인으로서 만들어진 상상계는 타의적인 것들에 의존하며, 또 외부적 압력에서 전혀 자유로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일단 이것들을 종합하여 하나의 세계에 대한 해명을 적어보자. 버스 정류장의 무의식들은 사유들에 초점을 맞추고, 그 초점은 다시 하나의 기표를 입고 ‘마당’으로 나와서 혼자, 혹은 여럿이 이리저리 섞이거나 회전하면서 사유에 영향을 준다. 그리고 다시 그 버스가 기표적으로 유사하다고 추론했던 다른 버스들을 불러 일으키면서 사유의 연쇄를 일으킨다. 세계의 타성에 자동적으로 우리는 반응하게 되고, 텍스트의 불안정성에 영향을 받으면서 기표의 강도를 계속해서 새롭게 만들게 된다.
세계적인 타성, 모든 텍스트를 포함하여 국가라는 공동체, 혹은 하나의 대륙이라는 공동체가 만들고 있는 속박적인 기표들의 연쇄들이 우리의 사고에서 버스들을 기표로 장식하는 데에 있어서 버스의 프롤레타리아적인 부분들을 깎아내리게 되고, 최초의 언어―기의들을 생성하는 단계에서 얻게 된 모든 기표의 기의들이 축소시켜진다. ‘정치’라는 5개의 음운으로 만들어진 단어는 최초의 단어 획득 단계에서 얻게된 ‘차이성’의 법칙에 따라 하나의 의미를 생성하게 되는 반면, ‘정치’라는 단어가 계승적 성격을 가진 사회에 계속해서 나타나게 될 때, 그것은 계승적인 측면을 가진 단어로 변질된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정치’라는 단어가 존재하게 되며, 다시 그것이 이 텍스트로 인해 깨지고, 이 텍스트로 정해진 ‘정치’가 다시 깨진다.
그러므로 하나의 단어의 기의는 매우 축소되어서 다른 단어가 그 외부의 것을 해결하기를 원한다. 그러면 차이성의 원리에 따라 문화, 미학, 철학의 분야가 더욱 커지게 되고 그것이 ‘정치’에서 비워진 자리를 해결한다. 그러나 단어들의 ‘세부적이며 진정한 기의’를 찾기 위해서 기표들을 따라 이동해보면, 원래 ‘정치’에서 가리키던 기의의 나머지 부피를 제대로 채우지 못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이 반복되다보면 결국 세부적이며, 억압 아래에서 부정당했던, 그러므로 버스로 채용되지 못했던 사소한 기의들은 점점 소멸하게 된다. 결과는 현대의 언어이다.

존재, 혹은 기의, 혹은 기표가 다른 요소들 간의 ‘차이’에서만 생성된다는 사실은 옳은 것일까?













버스들은 세계와 관련해감에 따라 점점 축소되고, 소멸되며, 결국 정류장의 버스의 존재, 혹은 버스를 선택하는 무의식은 세계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간다. 그러므로 유물론적인 사유들이 우선시되며 최초의 버스들, 혹은 세계와 관계하면서 나타났던 정신병적인 망상들, 환청들, 환각들, 환시들은 점차 사라지게 된다. “우리는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태어나지 않았는가? 왜 세계와의 관련을 부정하는 것인가?”―세계는 반복, 그러니까 유물론과 한정적인 기표들을 수시로 보여주면서 버스들을 소멸시키려고 하기 때문이다. 더 깊숙이 들어가면 사회체계, 민주적인 사상, 그리고 [기독교적 윤리성]들이 버스들을 억압한다. 기독교적 윤리성이 사회체계를 만들며, 사회체계는 혁명과 반복하여 민주정치를 만든다. 그럼으로써 나타나는 하나의 부조리, “민주적인 것의 부조리”가 다시 사유를 잡아먹게 되며 사람들은 해결 방법을 찾을 수 없다.
민주적인 것의 부조리의 기반은 어떻게 되어 있는가? 플라톤적 정치 사유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면서 나온 것이 민주적인 정치다. 지식에 있어서 평등화의 철학은 지금까지도 존속하고 있고 그것이 더욱 더 강해지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그것에 대한 이론적 실천의 작업은 그것이 무엇인지를 완벽하게 해명하는 것과 그것을 부수는 방법을 고민하는 것으로 나뉘어진다. 그것의 문제제기가 그것이 무엇인지를 해명하길 바라는 것으로 시작되었으므로 그것이 무엇인지 해명하는 것이 먼저가 될 것이다.

[0]
내가 애초에 오류에 존재했다. 오직 기표들만이 ‘차이성’에 의존하고 그것을 표현하고자 하는 자아에게 있어서만 그것의 해명 방법을 ‘차이’에게서 찾기를 요구된다. 세계 활동을 하나의 표현으로 압축하여 설명하고자 했던 철학자들, 그러니까 샤르트르와 같은 철학자들 에게는 이런 개념이 확대될 수밖에 없으나 정신 영역의 해명, 사유에 대한 해명을 바라는 나에게 있어서는 그것의 확대를 추구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사유가 ‘기표’로서 행해진다면 사유는 기표에 속박되어져 있고, 결국 사유도 차이로서 존재하지 않는가?―여기서 나는 나의 이론을 다시 갈아엎을 것을 요구한다. 기표들로서 사유하는 인간을 모델로 제시했던가? 아니다. 그것을 포착하고 표현하고자 할 때 사유의 활동은 기표로 국한되어버린다. 사유 자체는 포착되기를 원하지 않는 무절제적이고 무한정해 보이는 ‘무의식적 활동’이다. 그렇다면 프로이트를 빌려 의식과 전의식과 무의식을 나누어야 할 것인가? 애초부터 탐구 대상은 ‘사유 활동’ 그 자체에 있었다. 그 이후로 나타나는 표현의 방법에는 집중해야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사유 활동은 무의식의 표현이라는 프로이트적 사고에 있어서 사유 활동은 하나의 표현으로 국한된다. 내가 억지로 그것들을 물리치려고 하고 있진 않은가?
일단 여기서 얻은 자료를 적어보자. ‘표현’에 있어서는 기표가 완전히 지배적이고, 표현과 존재를 동일시하려는 시도에 있어서는 기표의 차이성에 대한 설명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 표현과 존재를 동일시하지 않으려는 시도에는 정확한 근거가 없으며 정확한 해명이 불가능하다. 무의식의 표현이라는 개념에서 의식이 표현 그 자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애초에 무의식이 버스를 장식하고 골라서 그것에 기표를 입힌다면, 내가 지금까지 말했던 이론은 완전히 속박적인 이론이 되어버린다. ‘그것을 인식하고자 할 때 그것은 하나의 표현이 된다.’라는 가정이 존재한다면 그것을 인식하고자 하지 않을 때의 해명이 철학적 해명이 됨으로 나는 그것에 대해 표현할 수 없다.
애초에 프로이트적 의식에서는 의식이 기표를 입지 않는다. ‘표현’에 대한 생각을 너무 확대한 것 같다. 아니 축소시킨 것 같다. ‘표현’은 무조건적으로 기표를 입는가? 그렇지 않다. ‘표현’ 그 자체가 차이성의 관계로 존재하는가? 그렇지 않다.
의식 자체가 하나의 ‘표현’인가? 그것은 확답을 내릴 수 없다. 프로이트는 그렇다고 말할 것이다. 의식은 무의식과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시간’의 개념을 포함하지 않는 것. 표현이 아니라 결국 하나의 ‘현상’ 일 뿐이다. 또는 과정이다. 의식이 무의식을 해명하고자 하는 이론에 너무 심취하면 안된다. 그렇다면 의식은 무의식의 표현으로 전락한다. ―무엇이 맞을까?

그것들은 어떤 영향과 억압일까? 그 기원과 흐름, 문화적 체계, 공동체의 체계의 본래적 목표와 현대성을 이어서 그것들을 해명해야 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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