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 이념
최인훈―광장 독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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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이란 소설은 교과서에도 나왔던 만큼 대한민국 국민에게 익숙한 소설이다. 그러나 광장은 굉장히 깊고 어두운 사상적 회의와, 같은 말일지 모르겠지만 사상의 이론적 꼬임이 있다는 점에서 교과서에 나오기에는 너무 어렵지 않은가라는 인식이 적어도 나에게는 있다. 그럼에도 교과서 편찬 당시에, ‘광장’을 실어야 한다는 의지를 가진 교육자들의 근거를 내 나름대로 유추해보자면, 625 이후 세대에게 전쟁과 이데올로기에 대한 재 사유를 시킨다는 점에서 학생들에게 유익하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다른 친구들이 드라마를 보고 예능을 볼 때, 혼자 책을 읽는다는 것에 지금 보면 낯부끄러운 자부심과 허영심을 가지던 고등학교 시절 한번 사서 읽었던 광장을 이번 리포트를 위해 내 자취방으로 가져와 다시 읽었다. 그러면서 나는 이 소설을 ‘이데올로기적인 회의’라는 주제 하나로 보기엔 그조차도 약간 버거운 축약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다시 한번 교과서에 나오기엔 너무 어려운 소설임을 다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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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제에는 독후감이라고 적혀있고, 특별히 일정한 형식이 정해져 있지 않은 까닭에, 서평과 거의 비슷한 형식으로 글을 쓰기로 한다. 그러나 개인적인 감상이 섞여 있을 수도 있고, 으레 어떤 글을 본 후기가 모두 그렇듯이, 당연히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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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광장이라는 소설이 하나의 서사적인 변증법의 과정이라는 전제를 깔고 시작한다. 여기서 이 변증법은 당연히 헤겔적 변증법이다. 이것은 책을 끝까지 읽자마자 떠오르는 말 그대로 독후감, 독서 후의 일차적 감상이었으며, 자본주의와 그 대립―공산주의, 맑스주의를 다루고 있다는 점, 그리고 후반으로 갈수록 맑스주의에서 그치지 않고 결국 맑스의 사상적 토대인 헤겔을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이런 전제를 들었다.
(그리스도교와 스탈리니즘의 핵심 이념을 아날로지로 만들어 하나하나 비교한 뒤) …철학을 배운 그는, 이 곡절을 흘려보지는 못했다. 곡절은, 마르크스가 헤겔의 제자였다는 데 있었다. ―184p.
어쩌면 내가 이 소설에서 하필 이 문단을 지나치지 못하고 이번 리포트의 핵심 주제로 삼은 이유도 내가 철학과를 다니며 철학을 배움에 있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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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증법으로 이 소설을 크게 읽을 때, 당연히 이 소설은 남한의 이념(정립) 북한의 이념(반정립) 그리고 갈등과 절망, 자살(생성)로 읽힌다. 그러나 가족 간의 사랑이나 이성에 대한 사랑, 그리고 핵심인 광장과 밀실의 대립 등이 더 핵심적으로 읽힌다. 그는 정치적, 나아가 사회적인 사람과 사람의 교류의 장을 ‘광장’이라고 칭했으며 그와는 모순적으로(이 부분이 가장 헤겔적으로 들린다) 광장이 더욱 확대될수록 늘어가는 개개인의, 부채와 같은 ‘안으로 좁아져 들어감’, 혹은 내면의 자아를 감추고 있는 곳을 ‘밀실’로 표현했다. 앞서 말했듯이 ‘광장’이 확대될수록 정비례해 늘어나는 ‘밀실’은 그 말 자체로서 모순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뜻을 살펴보면 그렇지 않다. ‘그리스 자연주의 학파’를 동경하고, 또한 ‘보이고 만져지는 것’을 찬양하는 그는 자연스럽게 ‘원시사회’를 찬양한다. 당연하게도 원시사회는 문명 이전의 사회, 문자 이전의 사회이며 따라서 그곳에는 이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념이 존재하지 않음은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것이 왕이나 혁명가가 아닌 그 개인의 필요에 따른 인간, 혹은 인간들, 혹은 개인 모두이며, 따라서 사람들이 뭉친 하나의 ‘장’은 광장도 아니고 밀실도 아닌, 광장과 밀실의 대립어 자체가 무의미한 하나의 모임이다. 그러므로 광장이라는 개념을 필요로해서 만들어낸다는 것은 반정립인 밀실을 같이 존재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리더가 나타나서 사람들을 한데로 모이게 할수록 그 사람들은 그 모임이 끝나면 개개인의 밀실을 만들어낸다.
이명준은 당연히 그것이 지칭하는 수많은 사람 중 한 명임이 틀림없다. 작가는 은유를 위해 개인적인 대립으로 나아간다. 예를 들면 윤애와 은혜의 대립이 그러하다. 윤애는 자본주의 국가 국민의 대표적인 성격으로 예측되는 능동적이고 거부하는 주체다. 그러나 명준은 윤애가 ‘능동성’을 가지고 자신을 거부하는 것이 싫다. 어쩌면 명준의 이러한 부정적 생각은 자본주의 국가의 대표적인 인물에 대한 부정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반대로 이명준이 북으로 건너가서 만난 은혜는 수동적이다. 자아비판회 때문에 늦게 들어간 명준을 은혜는 타박하지 않는다. 심지어 그런 상황에서 지친 생각과 몸을 끌고 간 명준이 허벅지를 만지며 관계를 청해도 은혜는 묵묵히 받아들인다. 그래서 은혜에게 있어 명준을 향한 가장 큰 반항은 모스크바로 떠난 것이다. 그러나 모스크바를 떠난 것 또한 표면적으로는 명준이 그것을 허용함에 이유가 있다. 명준이 불안을 감추지 못하고 은혜에게 자신을 떠날 것 같다고 계속해서 신뢰를 확실히 가지지 못한 말을 하자, 은혜는 자신이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고 되물었고, 명준은 ‘마음대로 해’라고 대답한다.
명준과 은혜가 재회하는 장면은 명준이 찬양했던 원시적이고 육체적인 것에도 결국 회의를 느끼는 중요한 장면이긴 하지만, 윤애와의 대립 관계에서만 본다면 은혜의 수동적 성격을 완성하는 하나의 장치로 볼 수 있다. 은혜는 재회 때 암묵적인 요구를 들어주지 못함을 눈물로 사과하면서, 간호병을 자진해서 지원했음을 말한다. 이런 남과 북에서 각각 만난 이성의 대립에서 명준이 결론적으로 얻은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윤애를 버리고 사랑이 끝난 것이고, 은혜의 죽음으로 사랑이 끝난 것이다. 이 대립을 포함한 모든 정립과 반정립의 관계에서 작가는, 헤겔적 관점에서는 생성되어야 할 것을 ‘무’ 또는 ‘허무’로 끝내고 있다. 이제 소설에서 가시적으로 보이는 대표적 대립인 남한과 북한의 대립을 살펴보자.
먼저 이명준은 이데올로기의 큰 대립에서 ‘그 이념 자체의 논리적 구조나 전제’를 내면적 목소리 혹은 외면적 목소리로 비판하지는 않는다. 이명준에게 이데올로기는 ‘체험되는 것’이다. 이명준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첫 비판은 정치를 권하는 정 선생에게 광장의 개념으로 답하면서 시작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거기에는 자본주의 국가 자체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정치가들의 더러운 술수에 대한 비판이 있다. 정당하게 맞서서 권력과 자본을 쟁취해내는 그 개념에 대해서 이명준은 비판할 생각이 없다. 그러나 국가 이데올로기는 결국 국민 전체에 적용되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과 떼어놓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명준에게 국가 이데올로기는 개인의 사소한 일탈이나 자칫 이데올로기 실행에 있어 오류로 보이는 정치인들의 부패와 떼어놓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분노도 잠시, 이명준은 생각에 대해서는 모르겠지만 행동적으로는 철저한 허무주의자로 정치에 참여해 국가를 어떻게 고쳐나가거나 해외로 이민을 떠나거나 할 생각 또한 없다. 그런데, 그렇게 살아가던 이명준을 뒤흔드는 사건이 하나 일어난다.
자신의 아버지가 대남방송에 나오고, 그의 아들인 이명준은 경찰에 가 두 번의 취조를 받는다. 이명준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지만, 경찰은 이명준에게 폭력을 가하고 이명준은 피를 옷에 묻힌 채로 언덕에 올라가 그늘 밑에 앉아, 국가가, 명백하게 보이는 이러한 위법에서, 반대편의 이데올로기와 조금이라도 연관이 있는 사람을 지켜주지 않음을 깨달으면서 분노와 극심한 회의를 느낀다. 이것이 그가 북으로 향하게 된 기폭제였다.
북으로 간 그는 또다시 국가 이념과 다르게 실행되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공산주의 국가에서 ‘김일성’을 특별 취급하며 찬양하는 사람들이나, 거기에 있는 기호만 다르게 바뀐 부르주아 계급(아버지와 같은 특권층)과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가난(아직도 일제 시대의 옷가지를 입고 있는 농민)을 본다. 여기서 핵심적인 것은 ‘생각’의 통제와 ‘혁명’의 부재이다. 공산주의 사회는 이상적인 사회로 모두가 코뮤니스트이면서 혁명가적인 열정으로 국가를 굴려내야 그것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권력에 대한 욕심과 일차원적인 생각을 지닌 특권층과 생각을 통제당하는 가난한 국민으로 인해 모든 노동은 노동자에게 국가와 국민을 위한다는 자부심을 지니게 만들지 못하고 그저 명령에 의한 마지못한 노동으로 치부된다. 때문에, 노동자들에 있어 자신이 먹을 만큼의 농사일을 마치고 하는 국가를 위한 노동은 자본주의 체제에서와 같은 피곤하고 텅 비어있는 잉여노동이다.
이러한 대립구조에서 이명준이 만들어낸 헤겔 변증법적 생성은 무엇인가―그것 또한, 무 혹은 허무(중립국)이다. 이명준에게 중립국은 어떤 일을 적극적으로 해낼 새로운 땅이 아니다. 중립국으로 가는 배 위에서 의료, 소방과 관련된 직업 등과 같은 미래를 생각해보지만, 그 생각을 하는 이명준에게 벌써 허무의 낯빛이 느껴진다. 그는 중립국을 선택했던 그때부터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듯하다. 만주에 배가 도달했을 때, 오랜만에 여자를 한 번이라도 품어보자고 배를 내리기 위해 반란 비슷한 것을 일으키는 다른 탑승자들과는 다르게 그는 육체적 욕망까지도 잃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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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두 팔을 동그랗게 말면 만들어지는 공간 만큼의 광장만을 원했다. 그러나 그에게 돌아온 것은 두 국가의 이념적 배신과 두 연인과의 이별과 그가 말한 마트료시카 인형이다. 제대로 된 국가라는 인형을 원했고, 그것이 되지 않자 더 작은 공간에 이성과의 사랑이라는 인형을 원했고, 그것조차 되지 않아 ‘자신의 나’라는 인형을 원했으나 나를 열어보자 마트료시카 인형처럼, 혹은 초반에 정 선생이 보여준 미라처럼 속이 텅 비어있었다. 커다란 부채꼴에서 시작해 걸어가 결국 도착한 곳은 두 발을 디디기도 마땅치 않은 공간이며, 그 앞은 절벽이다. 등이 더 떠밀리자 결국 그는 배의 갑판에서 바다로 떨어진다.
전체를 다시 보자면 이 소설은 헤겔의 변증법이면서 헤겔과 마르크스의 변증법에 대한 비판이기도 한 것 같다. 만약 그의 말처럼 하나의 국가가 대립으로 실패하고 다시 국가가 태어난다면, 그것은 과연 그가 말한 절대정신으로 향하는 국가인가에 대한 반문이다. 소설 전반에 흐르는 작가의 질문을 내가 감히 적어보자면 이러하다(그것은 굉장히 니힐리즘적인 질문이다). ‘남한과 그 대립인 북한의 신경전과 전쟁으로 과연 더 나은 세계가 온다는 말인가? 윤애와 은혜의 결론인 죽음으로 의미 있는 어떠한 생성이 이루어진다는 말인가? 결국 새로운 이념으로 탄생한 나라가 썩고 있는데 이것이 더 나은 생성이었단 말인가? 당신의 변증법이 틀렸을 경우, 우리는 무와 무의 대립, 무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니 대립조차 존재하지 않는 한 쌍을 가지고 계속해서 다투어왔는데 그것의 결론은 결국‘무’이니, 대체 어디가 맞는 길인가?’ 이것이 작가의 물음인 듯하다. 앞서 말했듯이 이명준은 떠밀린 끝에 바다로 떨어져 죽는다.
[풀려져있는 것을 보는 것이 삶이며 그것을 보지 않고 풀어야 할 일을 보는 것은 삶이 아니다. 마침내 인간이 풀어야 할 일을 한눈에 보여주는 것은 죽음이다. 그러므로 삶을 사는 인간이 풀어야 할 일을 볼 수도 없으니 더더욱 풀 수는 없다.] 은혜의 죽음을 통해 이명준이 했던 생각이자 작가가 우리에게 건네고 싶었던 말이다. 지금까지 이명준의 삶으로 우리나라와 북한의 이념적 대립의 역사―풀려져있는 것을 보았다. 그러면 이제부터 이명준의 죽음으로 풀어야 할 일을 보아야 할 때이다. 그리고 그것을 보는 것이 최인훈의 바람이며 작품을 쓴 의의일 것이다. 우리는 이명준의 죽음에서 아직도 풀리지 않은 우리나라와 북한의 대립과 나라 각각의 문제점 들을 본다. 그러나 대체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과연 그것을 풀어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그래서 그것을 찾을 수 있을까, 하고 나에게 자문해본다. 나는 최인훈의 소설을 읽은 모두가 아직도 찾지 못했다는, 그리고 앞으로도 찾지 못할 것 같다는 슬픈 생각이 든다.
마침 이 책을 다시 읽은 날은 오랜만에 인터넷으로 기사를 읽었던 날이었다. 4년이 지나고 또다시 대선 후보들이 쏟아져 나와 얘기하고 토론하던 날이었다. 나는 다시 기사를 읽지 않기로 마음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