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토옙스키 '죄와 벌'에 등장한 라스콜리니코프의 논문에 대한 단상
도스토예프스키는 사상소설가이다. 백치, 악령, 죄와 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4대 장편을 통틀어, 지하로부터의 수기 같은 경우 또한 사상소설이다. 죄와 벌은 그나마 장편 4개 중에서 읽기 쉽다는 점에서 유명하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읽기 편하고 자극적인 살인 묘사가 나온다고 해서 그것이 떨어지는 작품은 아니다.
죄와 벌은 읽을수록 니체적인 냄새가 나는 작품이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삶을 지속하는 수단으로 살인을 택했고 (그의 경제적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그것이 도출된 이유는 단연 그의 논문이다. 범인과 초인을 나누고, 초인이 범인을 착취하는 것은 정당하다는 사상이다. 그 착취는 법의 장벽을 넘어서는 것이 아니라, 비범한 인간으로서 도덕을 새로 창조하는 과정이다. 니체가 살인을 긍정했던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의 기독교적인 사회 통념을 부수길 원했고, 또 새로운 것을 창조하기를 원했다. 이런 면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니체적인 냄새가 난다.
하지만 결말에 다다르면, 조금 뜬금없이, 라스콜리니코프는 기독교적 참회를 하게 된다. 이는 그의 사형 현장에서 기적적으로 구출되게 된 것이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물론 그가 기독교인임이 많은 영향을 끼쳤겠지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도 기독교적 결말이 모든 사상의 올가미를 해결하고 하이라이트 지점을 찍었다는 점에서 더 극적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렇다면 경찰이 인상 깊게 봤다던 라스콜리니코프의 사상은 어떤 식으로 해결되는가? 도스토예프스키는 그것을 극단적으로 밀어붙여서 사회 통념적인 도덕 감정을 건드리고-살인처럼- 그 구원은 기독교에 있다는 식으로 유도한다. 여기서 받는 느낌은 지하로부터의 수기에서도 나타난다. 벗어날 수 없는 수정궁. [1+1=2]를 인정하면서도 대항하는 거의 미쳐가는 사람을 묘사하는데 그때의 그런 사상들은 사회통념적 도덕의 기준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했었다. 미쳐버리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감정과 욕망의 힘을 적절히 사용하며 이성과 합치시켜 정상적인 인간의 범주에서 자살하지 않고 그것과 줄다리기를 하면서 시지프처럼 돌을 계속해서 굴러 올리라는 것이다.
때문에,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들은 ‘악령’을 제외하면-주인공 니콜라이의 죽음에도 악령이 들어간 돼지의 집단 자살, 기독교적 메타포가 확실히 들어가있긴 하지만 직접적으로 보았을 때- 기독교적 사상이 베이스에 깔려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런 기독교적 사상을 베이스로, 기독교적 사상에 반대가 되는 사상을 찾는다. 그리고 그 사상을 ‘비약’하고 일반 독자들의 지지를 받은 다음에 기독교적 결말을 클라이맥스에 넣고 소설을 마무리시킨다. 그런 점에서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은 라스콜리니코프의 사상으로 기독교에 대항하는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문학적 세대와 철학적 세대의 결을 똑같이 맞출 수는 없지만-어떤 사상이 러시아에 오고 그것이 보편화되고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의 재료가 될지 하는 문제 때문에- 어떤 사상을 가지고 있는지 유추해 볼 순 있다. 악령에서도 그랬지만 도스토예프스키는 당시에 화두가 된 어떤 사상을 가져와서 소설의 재료로 쓰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지만 라스콜리니코프는 니체적인-니체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은 것이 아니라 니체적인 사조가 쏟아질 때-사상을 크게 받은 것 같다. 소설에서는 초인과 범인의 구분, 초인은 어떤 것이든 할 수 있다는 사상 정도만 드러나지만 그의 사상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라스콜리니코프의 사상은 분명히 나폴레옹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폴레옹은 어떤 부분에서는 영웅이지만 도스토예프스키가 보기에는 그저 학살자로 밖에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기독교적 사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에도 절대로 살인을 저질러서는 안된다는 생각 말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상의 기반은 단지 정당화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정복과 계몽을 통해 인류를 발전시키는 것, 예수와 그의 추종자들마저 기독교를 따르지 않는 인간들을 계몽의 대상으로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계몽의 입장은 같지만 그들이 확실히 비교되는 지점은 욕망의 사용과 수단으로서 인간을 보는 것이다. 욕망, 욕구, 정복욕 그것들이 나폴레옹이 가지고 있는 욕망이다. 이런 욕망을 그대로 두고 기독교적으로 용서하고 참는다면 세계의 발전이 이뤄질 수 없다. 기독교적 사회를 갈아엎으며 새로운 사상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반대로 기독교 또한 인류사에서 가장 큰 역전을 이뤄냈다. 용서, 인내 등과 같은 그들이 만든 개념으로 말이다. 세계는 반대가 되어버렸다.
그렇기에 라스콜리니코프의 설정에서는 심한 비약이 보인다. 이것을 그저 메타포라고 보기엔 사상이 너무 노골적이다. 그의 논문을 계속해서 언급할 정도로 말이다. 생계를 위해 사람을 죽이는 것과 사상의 계몽을 위해 사람을 죽이는 것은 아주 다르다. 나 자신이 사상적 계몽을 위해 사람을 수단 취급하고 죽이는 것에 찬성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의 다름에 대해서는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계몽은 왜 필요했는가- 그것은 기독교적인 통념이 세계를 좀먹어갔기 때문이다. 모든 욕구를 억누르고 새로운 사상을 억압하는 것은 인류의 발전이 불가능할뿐더러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없고, ‘부끄럽게’ 만들기 때문이다. 파괴욕구, 성욕, 지배욕, 그러니까 힘에의 의지에 완전히 반대되어 있는 것이 기독교이다. 기독교에 반대인 라스콜리니코프의 초인과 범인의 사상은 개인적인 욕심이 아니었을 것이다. 돈을 위해서 전당포 할머니를 무참하게 살해한 것은 그의 사상과 맞지 않았고, 비유를 노렸어도 적합하게 맞는 비유가 아니었다.
초인과 범인은 세계를 계몽하기 위한 결과지 그것 자체가 기반이 되지는 않는다. 도덕률을 뛰어넘는 것은 단순한 ‘벌’의 개념-법적 체계를 넘어서는 개념보다 더 넘어가 있다. 그렇기에 라스콜리니코프가 그 사상을 기반으로 범죄를 저질렀다고 하고, 그를 지탄하고 기독교로 승화시키는 것은 당시 사상의 파도에 어떤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
결론적으로 내가 보기에, 도스토옙스키는 사상 소설가 이면서 그것을 적합하게 옮기는 측면에서 실패했다. 나폴레옹의 정복이 단지 살인이라는 점에서 경제적 살인으로 대체된 점에서도 그렇고, 기독교를 완전히 반대하는 사상인데 그것을 기독교의 참회로 해결한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위대한 작품이지만 사상적 소설이라는 지점에서 까뮈, 샤르트르 같은 소설가처럼-이들은 철학자였기도 했지만- 큰 영향을, 적어도 나에게는 만들어내지는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