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나에겐 아버지가 두 명 있다. 두 명은 모두 나의 친아버지다. 아버지가 두 명 있다는 것은 어릴 적 나에게 콤플렉스였다. 선생님이 주는 프린트에서 가족관계를 묻는 문항이 나오면, 아버지 두 명을 모두 적어야 했고, 친구들은 내 프린트를 걷으면서 아버지가 두 명인 것을 보곤 그것을 주제로 수군대고는 했다. 참관 수업 날이면 두 분이 항상 같이 오셨고, 두 분 모두 한 아이의 아버지로 선생님과 학업, 학교생활에 관한 상담을 했다. 그러므로 친구들은 눈에 띌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들을 가지고 나를 놀려댔다. 나는 그런 짓궂은 놀림을 혼자서 이겨낼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이겨내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지금도 나는 아버지가 두 명이라는 것에 대해서 약간의 부끄러움과 불쾌감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날 밤 문득 어릴 적 놀림 받던 때의 일이 꿈에서 나오면, 나는 다시 아버지가 두 명이라는 무정한 운명에 원망 비슷한 것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그런 원망은, 아버지가 두 명이라는 것, 그 자체에 대한 원망이지, 두 명의 아버지에 대한 원망은 아니다. 나는 어릴 적부터 아버지들에게 잘 대했으며, 실제로 그들을 존경했다. 그것은 지금까지도 그렇다. 내가 이 두 아버지를 존경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그들이 해 주었던 말을 이 글에 적어두고자 한다.
어느 날 첫 번째 아버지와 영화를 보고, 밤에 조용한 술집에 가서 가볍게 술을 마실 때였다(술집엔 아무도 없었다, 주인조차도). 꽤 오랜 시간 진중한 이야기가 오간 터라, 분위기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얘기가 거의 다 마무리가 된 느낌이라서, 이젠 슬슬 집에 가려나 하고 생각했던 때였다. 그래서 나는 의자를 뒤로 밀고 일어서려고 했다. 그러자 갑자기 아버지가 말을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다시 의자에 앉았다.)
- 담배란 너무 악독한 거야(그는 담배를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었다). 냄새가 불쾌하고, 몸에 좋지 않아서 끊고 싶더라도 결국 처음 몇 갑을 핀 상태에선 절대로 끊을 수가 없어. 담배를 끊었다는 사람들에게선 무언가 언어적 모순이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지지. 그들은 담배를 끊는 것이 아니라 참는 것이거든. 결국에 그들은 힘든 날에 참았던 담배를 다시 한 개비 피게 되고, 그 이후로는 다시 흡연 습관이 발생하지, 그리고 그 이후에 다시 담배를 끊는다는 결심을 하게 되면, 그들은 담배를 ‘참게’ 되는 거지. 그들에게는 항상 담배의 사념이 뇌 속에 자리 잡고 있거든.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어떠한 타성에 의해서 옳지 않음에 물들여진 후, 그것의 사념을 끊어버리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거야. 사념은 끊어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야. 내가 여기서 말하는 옳지 않음의 사념은, 그러니까 ‘생각’하고도 달라. 물체, 사건과도 다르지. 언어적 해석에선 내가 모순을 내뱉고 있는 거겠지만, 내가 바라는 건 뉘앙스적 측면에서 ‘옳지 않음의 사념’을 생각해 보라는 거야. 이러한 말들은, 아니 이러한 사고들은 언어로도, 그 어떤 것으로도 전할 수 없지만, 언어의 전체적 구성과 뉘앙스로는 어느 정도 전해질 수 있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옳지 않음의 사념은 심장에 박혀있는 문신 같은 거야. 난 평생을 완전한 인간이 되기 위해 살았어. (이것은 하나의 예에 지나지 않지만) 나는 애초에 태어나길 소위 말하는 도덕적인 인간으로 태어났고, 여러 도덕적 모순들 사이에서도 최대한 나의 태생적인 도덕적 마음을 사용해서 그것들을 해결하기 위해 애썼던 거야. 그리고 운이 좋게도 여러 사회환경이 결국 나의 바람에 맞게 돌아감으로써, 이 사고- 그러니까 세계를 만지는 방식이 나-세계의 논리적 관계 속에서 인정받게 되었어. 그러나 내가 완전히 나를 버리고, 냉철한, 마치 연쇄살인마 같은 방식으로 이 세계의 구조를 떠올려 보면 알지, 옳지 않음의 타성은 분명히 존재해서, 나와 세계의 관계에 흠집을 남기리라는 것을. 그리고 그것은 외부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내부에서도 절대로 잘라낼 수 없도록 존재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은, 외부에서 존재할 때도 그것의 압도적인 힘으로 내부에까지 영향을 끼치기도 해. 그리고 심지어 그 영향은 단발적인 영향이 아니라, 계속 쌓이는 영향이야. 어떤 외부적 옳지 않음의 사건을 인식함으로써, 내가 옳지 않음의 영향을 받았다면, 그것은 다시 체내로 들어가 나의 해석에 따라 변형되고 그것이 고착되어 이 몸속에 쌓이게 되는 거야. 죽을 때까지 영원히. 물론 그것을 남들에게 드러내지 않을 수도 있고, 내가 원하는 대로 살려고 시도할 수도 있지. 심지어 그것이 논리적으로 맞지 않을뿐더러 나의 논리적 부분이 아닌 것을 포함한 사상에도 맞지 않을 수 있어. 그러나 그것이 기생충처럼 평생을 나와 살아간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 이것에 대해 인식하기 싫지만, 그래도 인식하지 않으면 그것의 옳지 않음은 무의식적인 것으로 영향을 끼쳐서 결국 어떤 생각, 말, 행동 등에 영향을 미치지. 그래서 그건 ‘내가 계속해서 어떠한 인식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떨어뜨려 놓을 수도 없고, 극복할 수도 없는 부조리한 세계의 성분이야. 그러니 이것을 다루는 방법은(세계와의 관계에서 조언하는 거야, 나에게서는 다룰 수 없어), 끊임없이 이것을 의식하고, 만약 이것이 논리성에서 앞선다면 그것을 인식하면서 억누르고, 그러한 성분의 생각이 떠올랐을 때는 그 떠오름을 인정하면서 생각의 초점을 돌려 버리는 거지. 절대로 ‘이것은 내 생각이 아니야.’하고 넘겨버리면 안 돼. 그러면 그것이 무의식적인 곳에서 발현하게 될 때, 자기 자신이 그러한 불쾌한 사건의 원인을 모르게 되어버려. 그러나 내가 말한 대로 그것들을 다루더라도, 그것이 완벽하게 나-세계의 관계에서 배제되어 있음을 단정할 수는 없어. 어쩌면 지금 이렇게 말하는 나의 말에서도 그것이 관여했을지 모르고, 심지어 어떤 옳은 행위를 하더라도 그것이 관여했을지 모르는 거야. 더욱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모든 옳은 행위에도 그것들이 관여했을 수도 있어. 그러니까 내가 말하는 세계의 관계 속에 옳지 않음의 타성에 관한 조언은 그것을 아주 약간 억제하는 것에 대한 조언일지도 모르는 거지. 나는 그것을 그렇게 인식하고 있지 않지만 말이야.
술집은 어두워서 아버지의 눈빛은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런 빛남 가운데에서도 어쩐지 약간 흐릿하고 초점이 빗나간 느낌이 들었으며, 심지어 그의 얼굴 전체가 어쩐지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것 같은 인상이었다(물론 그는 살면서 한 번도 운 적이 없다). 나는 그가 마치 굶어 죽기 전의 숫 사자와 비슷하다고 느꼈다. 그렇게 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멈춘 채(눈도 거의 깜빡이지 않았다), 30분 동안 앉아 있었고, 나는 그만 지루해져서 술집 밖으로 나와 담배를 한 대 피우고, 택시를 잡아탔다.
중간에 말해야 할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말하지 않아도 될 부분인지는 모르겠지만, 혹시 모르니 적어두기로 한다. 나에겐 어머니가 있는지 없는지 확실하지 않다. 현재의 어머니가 있는지 없는지 확실하지 않다는 게 아니라(그녀가 실종됐다거나 하는 유치한 차원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정말로 나를 모체로써 임신하고 낳은 여성이 있는지 없는지 확실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의 존재는 정말로 애매모호 했으며, 아버지들도 그것에 대해선 몰랐다(숨기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몰랐다). 그것은 나에게 슬픈 일처럼 느껴지다가도 유쾌한 일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것의 존재 자체도 애매모호 했지만. 그것에 대한 내 감정조차도 애매모호 했던 것이다.
첫 번째 아버지와의 일 이후 두 달쯤 지난 어느 날, 나는 학교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지금으로 치면 나의 모교인 그 초등학교는 집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있어서 5분 정도만 걸어오면 집으로 올 수 있었다. 신발을 벗고 집안으로 막 들어오자 두 번째 아버지의 방에서 여성의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방에서 옷을 갈아입고 가방을 내려놓은 다음, 거실로 가서 티비를 켜고 소파에 앉아서 티비를 보았다. 20분 정도가 지났을 때 여성의 신음 소리는 멎었고, 아버지는 방에서 나와 소파 오른쪽에 굽어진 부분에 앉았다. 아버지와 같이 나온 여성은 티비에서 조금 떨어진 오른쪽 옆에 섰다. 여성은 20대 후반 정도로 보였다. 살집이 전혀 없고 완전히 말라서 뼈에 가죽만 붙어있는 것처럼 보였다. 표정은 없었고, 눈은 푹 들어갔으며 그 주변엔 까맣게 화장을 했고, 눈썹이 거의 없었다. 광대뼈가 크게 튀어나오진 않았지만, 살이 너무 없어서 볼이 푹 들어갔기 때문에 광대뼈가 강조된 인상이었고, 입술도 굉장히 엷었다. 하얗고 전체적으로 기장이 매우 짧은 티셔츠를 입고 있었고, 하의는 종아리 중간쯤 오는 분홍색의 넓은 치마를 입고 있었으며, 치마가 가려주는 부분 말고는 온몸이 (앞서 말한 대로) 뼈에 가죽만 붙어있는 것처럼 보였다(가슴에도 지방이 전혀 없었다). 여성의 인상이 나에게 꽤 중요한 것 같아 묘사를 진행했지만, 이것이 제대로 전해질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그녀는 전혀 중요하지도 않았는지도 모른다. 하여튼 소파에 앉은 아버지는 담배를 하나 꺼내 나에게 권하면서, 자신도 담배를 꺼내 물었다. 두 모금 정도 빨고 나자 그는 말했다.
- 인생이란 파도와 같다는 말이 있지. 통상적 의미로 보았을 때는 인생을 살면서 여러 가지 굴곡이 다가온다는 말이겠지만, 그렇게 본다면 이것은 그냥 당연한 말을 굳이 은유를 옮겨서 한 말에 불과해. 그것도 아주 유치한 은유지. 나는 이것을 다른 의미로 해석하고 싶어. 파도도 그냥 띄엄띄엄 오는 파도가 아니라 계속해서 휘몰아치는 파도로 해석하고 싶지. 사실 파도는 계속해서 치는 거야. 1시간 동안 얼마만큼의 파도가 치는지 새어본 적이 있나? 나는 파도의 횟수를 인생의 타성의 횟수와 비슷한 것으로 생각해. 그러니까 1시간 동안 파도가 치는 횟수는 인생의 1시간 동안 굴곡이(통상적으로 말하자면) 오는 횟수지. 어쩌면 그보다 훨씬 많을 수도 있어. 그러나 물론 이것은 전부 나에게 직접 다가오지 않아. 그러니까 내가 다른 해석을 요구하는 거야. 모든 타성적인 것, 그러니까 그중에 부조리하게 느껴지는 것들도 이렇게 다가온다는 거지. 통상적 의미에서의 불운을 파도로 묶는 것은, 여기에서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아. 그것은 자신의 기준에서 올바른 어떤 것을 체화하여 살아갈 때 느껴지는 파도지. 그러니까, 모든 인생의 순간순간이 자아에 대한 세계의 타성적 도전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거야. 그리고 그것은 물 위에 떠있을 때 맞는 파도처럼 불가피하다는 거고. 그것은 세계와 나의 긴장 관계에서 끊임없이 지속되고, 끊임없이 나와의 도전을 요구하지. 하지만 그것은 올바른 어떤 것을 체화하여 살아갈 때 불가피하고 부조리한 것으로 느껴지게 되는 거지.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나-세계와의 긴장 관계를 완전히 나의 것처럼 생각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거야. 마치 타성적인 불가피함을 자아와 같이 존중하면서 말이야. ‘불행을 즐겨라’ 같은 세속적이고 불가능한 얘기가 아니라, 정말로 그것을 자아와 같은 것으로 생각하며 살아가라는 얘기야. 그렇게 생각한다면 정말로 그 긴장은 자아와 같은 것으로 나에게 다가오게 되지. 더 깊이 나아가서, 내가 긴장을 자아와 같은 것으로 느낀다는 것은, 정말로 나의 기준에서 그것이 자아와 같다는 것을 얘기하게 되고, 이것에 대한 긴장 자체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게 되면서(그 순간 그 긴장은 정말로 없어지는 거야!) 평온한 상태에 있게 되지. 이 ‘평온한’을 또 이상하게 해석할 것 같아서 말해두는데, 어떠한 분노를 갖게 된다고 하더라도, 나-세계의 관계에서 평온하다는 얘기야. 그러니까 그냥 성격적인 차원에서 평온함을 말하는 것은 절대 아니지. 너는 똑똑한 아이니까 이것을 이해했다고 믿겠네. 그러나 이것을 위해선 모순적으로 한가지 견뎌내어야 하는 세계가 던진 하나의 도전이 있지. 그것은 ‘올바름’을 제거하는 거야. 너는 ‘올바름’이 있다고 생각하니? 그러한 것은 없어. 타성에 의한(자아의 태생도 타성에 의한 거니까) 하나의 주관이 있을 뿐이지. 그것이 ‘올바름’이라고는 말할 수 없어. 그러나 자아는 그것의 올바름을 믿게 되지. 그러니까 이것을 굳이 언어로 전하자면, ‘이성적인 인식능력에 가장 완전하게 기반을 둔 세계에 대한 처음이자 마지막 도전’이야. 물론 나의 말처럼 타성을 자아처럼 다루기로 마음먹었을 때 말이지. 그렇지 않으면 인간은 세계와의 긴장 관계 속에서 평생을 살아가게 되고, 그것은 죽는 순간까지의 고통이 되어버려. 나는 회의주의자가 아니고, 염세주의자는 더더욱 아니야. 오히려 그 반대로 완전히 휴머니즘을 지향한다고도 볼 수 있지. 옳고 그름의 판단이 불가능한 것에 대해서, 그러므로 그것을 꼭 지켜야 하는 근거가 없다고 말하는 거야. 너는 당연히 내 말을 이해할 수 있겠지?
그는 상체를 앞으로 굽히고 눈을 위로 올려서 나를 노려본 상태로 말을 했다. 동공 안에서는 어떠한 확신이 나에게 동의를 구하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그저 관찰할 뿐이었다. 여성은 일어선 채로, 어떠한 희열에 대해 히스테리가 일어나 고개를 뒤로한 채로 거품을 물고, 놀라서 심장마비로 죽은 사람처럼 눈을 엄청나게 크게 뜨고서는 ‘억, 억’하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의 말이 끝난 후, 티비의 채널을 돌리고 볼륨을 최대한으로 높인 다음, 왼쪽으로 누워서 티비를 보았다. 귀가 찢어질 듯 거실을 울리는 티비의 소리가 왠지 편했다. 그러다가 잠이 들었고, 깨어나서 시계를 보니 9시가 되어 있는 게 보였다. 그 이후로 3시간이 지나있었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고 다른 불빛들은 모두 꺼진 채 티비만 켜져 있었다. 티비는 엄청난 소리를 냈다. 나는 피곤해서 내 방으로 들어간 다음, 잠을 자려고 했으나, 낮잠의 영향인지 잠이 오지 않아서 침대 위에서 눈을 뜬 채로 다음 날 아침까지 꼼짝 않고 누워 있었다.
아무런 결론이 없어서 읽는 사람들이 꽤 불쾌감을 느낄 거라고 예상한다. 나 또한 현재까지 결론이 나지 않은 이 대화(사건)들에 대해 약간의 아이러니함을 느끼고 있다. 왜 두 아버지의 아들인 나도 결론이 없다고 생각하냐며 나에게 화를 낼 사람들에게 그 이유를 말하고 싶다. 그 이유는 즉, 두 아버지가 몇 개월 지나지 않아 다 자살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지금까지 계속 그 아이러니를 가지고 살고 있으며, 오히려 자살 때문에 아이러니가 더해 졌다고 볼 수 있다. 어쩌면 그것 때문에 내 인생 자체도 이렇게 아이러니로 가득 찼는지 모르겠다.
위대한 아버지에게, 비웃음과 존경을 담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