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기에 관한 조언
모든 서술을 현재 어미로 사용해야 한다―그러나 내가 쓰는 모든 글은 과거에 존재하는 것이다. 페터 한트케가 현재성을 중시한 이유를 다시 찾아서 상기하고 이 글에 적어놓아야 한다.
애초에 내가 이 소설을 쓰고자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적당한 우울과 불안을 느끼면서, 정신을 유지하며 살아가고 있는 나의 기록을 남기기 위해―글은 너무 우울하지도 너무 평범하지도 않아야 한다. 자해의 모순성에 대해 폭로하고, 내 감정을 당위로 인정시키는 논거들을 너무 학문적이 아니라, 정신적 흐름에 따라 서술해야 한다.
꼭 서사의 흐름을 중요시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서사의 리듬을 따라가기 위해서 범위를 지정해야 하는가? 내가 일상 속에서 사고를 많이 하게 되는 시간과 장소와 리듬을 생각해보고 그것에 따라 서사를 진행 시킬 것.
서사는 완료되어야 하는가? 서사를 완료시킬 필요는 없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완료시키지 않을 경우의 미적인 감각들을 만족 시킬 수 있는가에 대한 논의는 확실히 필요하다. 미적인 감각들이 우선시 되어야하는가 전달이 우선시 되어야 하는가? 그것들을 중용해서 평행을 만들어야하는가, 아니면 한쪽을 높게 만들어야 하는가.
서사의 미 자체가 획일시 되고 평범한 미적 감각을 가진 사람들에게 만족을 시켜야 할 정도로 천박하게 되었다는 것은 자명하다. 내가 그 서사의 틀을 따라야하는가?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높은 미의식의 서사라는 것은 무엇인가? 사상의 리듬이고 의식의 리듬이다.
리듬으로서의 사상― 사상의 리듬으로서 평가될 때에 그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아닌지? 다른 인간들의 사상은 리듬으로서 평가가 적합할지 모르더라도 나의 사상은 불규칙적인 것들 속에 존재하여 리듬으로 평가하려하면 그 사상이 폄하되는 것은 아닌지.
언어의 틀 속에서 언어로의 초월을 늘 생각해야 한다. 손에 쥘 수 없는 것들을 손에 쥐는 척을 하기 위해서 어떤 흉내를 내야 하는지. 흉내로 실리를 얻을 수 있는 글들은 무엇이 있는지.
묘사에 대한 초월은 불가능한 것으로 나에게 증명되었으니, 묘사는 중요한 것―혹은 초점들을 중심으로 구성될 수 없음이 자명하다. 그러나 의미 없어 보이는 초점들을 중심으로 어떤 사상이 떠오르는 경우가 있다면 자동기술법과 비슷하게 그것들을 기용하여 묘사의 장치들에 사용할 것. 그것들이 규칙으로서 나타난다면, 그것들을 중점적으로 연구하고 결과를 바탕으로 사용할 것.
1 글에 현재성을 부여하기 위해 현재 어미를 사용할 것― 그러나?
2 내 감정과 사상을 머릿속 비율에 맞춰 묘사하는 데에 의의가 있다.
3 서사의 흐름을 꼭 중요시할 필요는 없다.
4 서사가 완료될 필요도 없다.
5 미의식과 전달 중 어떤 것을 중요시하고 어떤 식으로 써야 할지 정해야 한다.
6 고도의 미의식 서사는 사상과 의식의 리듬이다.
7 내 사상을 리듬으로서 표현하려고 할 때 그 사상이 폄하되는 것은 아닌지 알아야 한다.
8 언어의 틀 속에서 언어를 초월할 것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9 묘사의 초점이 상관없어 보일 경우에도, 초점이 중심이 될 경우 그것을 꼭 묘사해야 한다.